[금강일보 김현호 기자] 경영의 세계에서 필요한 건 풍부한 자금력, 뛰어난 연구개발(R&D), 누구나 혹할 가격경쟁력 등 다양하다. 이중 필요충분조건은 영업력이다.
자금력이 있어도, R&D가 훌륭해도, 가격경쟁력이 확실하더라도 제품이 소비자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 영업력이 필살기일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다. 영업력이 곧 사업 수완인 셈이다.
엄만진(51) ㈜유진타올 대표의 영업력은 모두가 인정한다. 그렇다고 영업력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새로운 플랫폼을 파악하는 관찰력, 과감히 뛰어들 수 있는 실천력까지 두루 겸비했다. 그리고 영업력으로 새로운 플랫폼에서 당당히 자리 잡았다. 그에게 영업력은 호랑이 발톱이자 사자 이빨이다.
#. 돈 버는 데 도가 트다
엄 대표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어머니가 돕는 평범하디 평범한 농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사육하는 소와 돼지 여물을 직접 챙겼다. 부모 돕는 효자였을까? 돕기는 돕되 이를 통해 용돈을 받았단다. 하지만 용돈이 많으면 얼마나 많을까. 그저 한두 푼 모아 20원짜리 핫도그를 사먹는 게 낙이었다. 과자라도 사먹고 싶은 날엔 여물 챙기기는 물론 축사 청소까지 했다고. 맛난 주전부리는 차고 넘쳤는데 돈이란 게 그렇듯 늘 모자랐다. 그래서 생각한 게 폐지를 내다 파는 것. 과거엔 학생들이 청소하고 직접 소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청소반장이었던 그는 소각장 앞에서 친구들과 갖다 팔 수 있는 폐지를 모아 고물상에 넘겼고 그렇게 번 돈으로 간식을 사먹었다. 그러나 권력은 오래 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청소반장 임기는 불과 6년밖에 안 됐고 눈물을 뒤로 한 채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그냥 돈 버는 게 좋았죠. 처음엔 부모님 일을 도우면서 용돈을 받았는데 월급처럼 용돈도 그렇잖아요. 늘 모자란 거에요. 먹고 싶은 건 얼마나 많든지. 당시 장래희망을 물으면 과자공장 딸한테 장가가는 거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국민학생 때 폐지를 모아 팔고 친구들이랑 이것저것 사먹었죠.”
중학생이 되고 이제 무엇으로 돈을 만질 수 있나 고민했다. 그러다 눈에 띈 게 바로 복싱. 특히 ‘장정구’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는데 1985년 당시 그의 수입은 2억여 원으로 국내 프로스포츠 선수 수입 순위 중 단연 1위였다. 장기적으로 볼 때 운동을 하면 돈을 많이 벌고 맛난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다 생각했다.
이내 체육관으로 달려갔고 제법 재능도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복싱을 배우며 충남대 사회체육학과에 입학이 예정됐을 정도니 말이다. 이와 별도로 돈 만들자고 밤엔 웨이터일도 했는데 운수 좋은 날엔 하루에 10만 원은 거뜬히 벌었다. 얼마나 많이 벌었냐면 당시 집안의 가전이며 가구며 모두 새 걸로 바꿔줬다고. 하지만 운동 중 부상을 입고 더 이상 글러브를 낄 수 없게 되자 과감히 포기하고 전설의 6방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 타월과의 인연과 첫 영업
소집 해제 이후 엄 대표는 보다 떳떳한 일로 돈을 벌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웨이터일을 하며 맺었던 연을 모두 끊고 유행하던 정비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그는 항공기 정비사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고 1년에 가까운 공부 끝에 결국 자격증을 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취업은 쉽지 않았다. 항공기란 거대한 기체를 만지는 데 신입은 못 미더웠는지 대부분 항공사는 경력자들을 선호했다. 그는 다른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다양한 자격증을 따고자 공부에 집중하려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덜컥 결혼에 골인한다. 이후 가족 부양하느라 공부는 아예 접고 택시기사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처가 쪽에서 하나의 사업을 제안했단다.
“당시 처가에서 큰 타월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습죠. 타월 가게를 열어 사업을 해 보는 게 어떠냐고 계속 권유했는데 남자 자존심 때문에 거절했어요. 처가에 빚지고 사는 게 좀 그렇잖아요. 그래도 구애가 계속오니 나중엔 결국 승낙했습니다. 타월과의 첫 인연이었네요. 제 이름과 와이프의 이름 한 글자씩 따서 유진타올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모든 가게가 그렇듯 초반엔 지인들이 와서 매출을 많이 올려줬다. 하지만 오픈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사업밑천으로 쓰인 대출금을 갚기 막막해졌다. 가게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다간 처는 물론 어느새 생긴 생때같은 자식을 굶길 판이었고 그는 결단을 내렸다. 전국을 돌며 타월을 팔겠다고. 그래서 봉고차 하나 구해 전국 팔도를 돌았다.
그의 첫 영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지금이야 영업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그런 그에게도 첫 영업은 엄청 떨렸다. 머릿속으론 어떤 인사를 할지, 언제 타월을 권유할지를 다 생각했는데 막상 영업을 하려니 뭐라고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안 난단다. 먼 옛일인데도 그 때만 떠올리면 낯부끄럽다고 한다. 하지만 될 때까지 계속해서 영업을 하다 보니 거래처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고 대출금은 1년 만에 상환했다. 뚝심이 빛을 발한 거다.
#. 처가로부터의 독립, 진정한 영업의 시작
엄 대표는 거래처를 발굴하기 위해 하루에 같은 곳을 서너 번 방문하기도 했다. “또 왔냐”라고 상대방이 물으면 능청스럽게 “사장님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왔고 한 번 더 본 김에 명함 한 장 더 주겠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그만의 단골이 하나둘 생겼다. 이젠 처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내 자연스레 독립한다. 이 때 완성된 자신만의 네트워크는 이미 처가의 그것을 뛰어넘었고 자체적으로 생산체제를 갖추기로 했다.
“공장 부지를 임대해서 본격적으로 공장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기계를 만지는 기사가 근무를 빼먹는 날이 많았죠. 그래서 일종의 공장장을 고용했습니다. 내가 공장 부지와 기계를 구입하면 우선 공장장에게 양도하는 겁니다. 단 유진타올 일정에 최대한 맞춰 운영을 해주고 몇 년이 걸리더라도 부지와 기계 비용 상환에 대해선 재촉하지 않겠다란 조건을 걸었죠. 이것도 생각해보니 제 영업능력이네요.”
이런 식으로 그는 5개의 공장을 운영할 정도로 번창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유통의 플랫폼이 빠르게 변하고 있단 걸 알아챘다. 이젠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을 노려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예전처럼 하루에도 여러 차례 유통 플랫폼을 직접 찾고 명함을 돌리며 온라인 판로를 조금씩 늘리기 시작했다. 영업력으로 이룬 성과다. 비록 최근 코로나19 악재로 지난해와 올해 최대 거래처인 호텔과 모텔, 대중목욕탕, 찜질방 등이 문을 닫아 매출이 줄었다. 하지만 관련 업계의 수익이 30% 하락한 것에 비해 유진타올은 불과 10% 안쪽만 출혈을 입었다. 빠르게 온라인 시장을 파악하고 능글맞게 영업으로 판로를 확보한 덕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야죠. 마음을 먹으면 무조건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는 신념덕분에 악재 속에도 어느 정도 선방했네요. 지금도 생각해보면 영업의 ‘ㅇ’자도 몰랐는데 해보겠단 일념으로 여기까지 온 겁니다. 단순히 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 경영을 하는 사람이라면 발로 직접 뛰는 것만큼 최고인 게 없습니다.”
그는 아직도 첫 영업의 순간을 기억하진 못 한다. 하지만 성공의 순간은 추억처럼 남는단다. 당시의 떨림이 주는 짜릿함 때문이다. 그 짜릿함을 영원히 간직한다면 유진타올의 물기는 마를 날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