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진학 포기하고 공군 입대
비행기시험검증장비 도입 완수
루맥스 입사 제안에 제대 결정
이후 KPIH 성공적 마무리하며
기술력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아


[금강일보 김현호 기자] 기업의 세계에서 입소문은 무섭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어떤 기업은 입소문을 타고 크게 성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기업은 반대로 퇴로를 걷기도 한다. 그렇다고 양념을 치면 금세 들통난다.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는 입소문의 순기능을 제대로 누린 기업이다. 국내 굴지의 기술력이란 입소문 덕분에 별도의 마케팅이 필요치 않은 정도다. 중심엔 원상구(51) 대표이사가 있다. 그는 기술력으로만 과장에서 대표이사까지 오른 탁월한 테크니션이다.

#. 군 입대로 맺어진 항공부품과의 인연

강원도 원주 출신인 원 대표의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업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성적으론 둘째가라면 서러웠을 정도. 고등학교는 특별한 곳으로 진학하고자 하는 마음이 짙었던 그의 선택은 전국 최고의 마이스터고등학교 중 하나이자 고(故) 정주영 현대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던 현대공업고등학교였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엘리트가 모인 현대공고에서도 원 대표의 성적은 단연 톱클래스였다. 응당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 욕심을 부릴 만 했지만 곳간 사정이 허락지 않았단다. 결국 대학 진학은 포기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 때도 믿을 구석은 좋은 머리였기에 공군 부사관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식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이 항로는 그의 미래를 결정짓는 뜻밖의 기회가 된다. 현대공고에서 배웠던 정비 기술로 전투기를 손보는 일이 잦았는데 나름 적성에 잘 맞았다고 한다. 더욱이 첫 발령지가 고향인 원주란 점 역시 그의 마음을 편안케 했고 더욱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점차 업무 숙련도가 오르고 고향에서의 근무란 점에 마음의 안식을 찾아갈 때 쯤 중사로 진급했고 심신의 여유가 생기자 못 다 이룬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고야 만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군은 그에게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긴다. 경남 사천 공군52시험평가전대로 발령내고 비행기시험검증장비의 성공적인 도입를 명령한 것이다. 비행기시험검증장비는 비행기의 성능과 안전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사하는, 국내 생산이 불가한 최첨단 항공기술의 집약체였다. 초대형 프로젝트 적임자로 원 대표가 낙점된 것이다. 그는 장비 도입에 앞서 장비 운영의 실질적인 교육을 받아야 했고 관련 장비를 납품키로 한 기업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를 만나다

미국에서 말로만 듣던 비행기시험검증장비를 보고 그는 너무 놀랐다. 온갖 비행기 관련 기술이 총집약됐고 나아가 우주항공기술까지 겸비된 장비에 입이 절로 벌어진 것이다. 장비를 한 곳에 모아 설비시설까지 갖춰 설치하면 적게는 20명, 많게는 50명까지 투입되는 거대한 시설이 주는 위압감은 실로 대단했다. 공돌이(?) 출신인 원 대표에겐 일종의 유토피아였다. 어려운 비행기시험검증장비 교육도 행복의 시간이었다. 모르는 걸 배워가며 쌓이는 지식이 주는 즐거움이었던 게다.

“사실 당시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는 것도 처음이어서 설렜어요. 도착해서 본 비행기시험검증장비는 더 놀라웠죠. 입이 떡 벌어지는 게 뭔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그곳에서 약 한 달 간 교육을 받고 귀국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기뻤던 나날들입니다.”

사천으로 돌아오자 군은 본격적으로 비행기시험검증장비 도입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고 원 대표는 비행시험의 모든 걸 기록하는 비행시험계측장비를 담당했다. 이곳에서 모두 1146번의 시험 비행이 이뤄졌으며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쯤 미국에서 인연을 맺은 원 대표의 지인이 그를 찾아왔다. 항공기부품이나 관련 소프트웨어 등을 개발하는데 미국에서 열성적으로 교육받던 모습이 잊히지 않아 스카우트를 하겠단 뜻을 밝히면서다. 지인이 제안한 첫 직책은 과장이었으나 원 대표는 원 없이 관련 장비를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제안을 승낙했고 곧바로 제대 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시 부대장은 비행기시험검증장비 도입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원 대표의 제대를 만류했으나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워낙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훗날 대표가 될 당시의 원 과장이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에 처음 발자국을 찍는 순간이었다.

  

#. 기술력으로 과장에서 대표까지

입사 후 원 대표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국형헬기개발사업(KHIP)에 들어갈 설비를 국산화시키는 프로젝트 수주였다. 당시 군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헬기를 국산화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그래서 헬기에 들어설 설비 하나하나마다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는 이 중 76억 원에 달하는 프로그램에 도전했다.

해당 장비는 KHIP를 주관하는 방위사업청에서도 국산화가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을 정도의 난제였다. 원 대표는 프로젝트 내용을 꼼꼼히 톺아본 뒤 충분히 국산화가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특히 미국에서도 훌륭하게 비행기시험검증장비 관련 교육까지 받고 관련 시설의 국산화를 위한 프로젝트에 참가한 경험을 비춰볼 때 자신에겐 불가능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고.

그는 PPT를 통해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와 자신의 기술력을 어필했다. 당시 KPIH 프로젝트 담당자 중 한 명이 원 대표가 군인 시절 모셨던 상관이었는데 군 생활을 하며 대학에 진학하고 비행기시험검증장비 프로젝트도 훌륭히 완수한 그를 믿어보자고 심사위원들을 설득했단다. 그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면서다.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한 원 대표는 원활한 작업을 위해 아파트를 한 채 임대했다. 6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아파트에 모여 오전엔 장비 하드웨어를 구성하고 밤엔 소프트웨어와 관련한 문서 작성 업무에 매진했다. 정확히 8시간은 HW, 8시간은 SW 작업을 했다. 하루 16시간이나 근무한 것이다. 밥을 차려먹을 시간도 부족해 삼시세끼 모두 배달음식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도 엄청 즐거웠던 기억밖에 없어요. 그냥 행복한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숙식하며 할 수 있었으니 말이죠. 그렇게 일에 몰두하면서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에서의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냈죠. 이 때부터 우리를 원하는 곳이 많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성공적인 KPIH 프로젝트 마무리로 입소문이 퍼진 덕분에 국토교통부로부터 국내 최초 민간항공기인 KC-100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수주했고 국방과학연구소의 원격지계측중개소 설비 사업, F-15K 도입 당시의 비행시험설비 등 다양한 사업을 성공시켰다.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의 이름은 점점 널리 퍼졌다. 특히 F-15K프로젝트를 마무리했을 땐 보잉사로부터 기술력을 극찬하는 편지까지 받았다. 프로젝트 사이사이엔 R&D를 담금질하는 시간도 가지며 갈수록 무기를 더욱 갈고 닦았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그는 과장에서 이사, 이사에서 대표까지 승진했다. 갈고 닦은 기술력이 열쇠였다.

“사실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에 입사할 때 대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하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보니 느껴지는 게 하나 있습니다. 마이크로리더십, 바로 솔선수범하며 직접 프로젝트에 뛰어드는 거죠. 대전에선 항공부품 등 관련 인력을 구하는 게 힘들어 제가 많은 작업 현장에 뛰어들어 생긴 신념인데 진정한 경영은 그렇다고 생각해요. 언제 어디서든 무슨 일이 터져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곧바로 수습할 줄 알아야 한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기술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금도 노력합니다.”

항공장비에 필요한 센서는 물론 관련 소프트웨어와 비행시험 원격계측 인프라, 비행지원 및 장비와 정비 등을 취급하는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의 원 대표는 땅보다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잦다. 이들의 이상은 항상 위에 존재한다. 굴지의 기술력을 가진 만큼 남들에겐 이상이 그들에겐 실현 가능한 현실이다.